2022. 12. 24. 16:13ㆍReading Life
멈추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작년 이맘때, 나는 살랑이는 바람을 맞으며 내 앞에 어떤 군 생활이 펼쳐질지 호기심 반 두려움 반을 가지고 입대했다. 군 생활은 흐르고 흘러 2022년 새해가 밝았고, 처음 계획했던 것들을 어느 정도 완성해낸 것을 보며 뿌듯한 마음으로 군 생활을 돌아보았다. 남은 절반의 기간은 더 의미 있게 보내고 싶어 작년보다 더 많은 책을 읽자고 다짐했다. 책이든 뭐든 하나라도 내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들로 채우자는 생각에 자기 계발서와 전공 관련 책들로 독서목록들을 열심히 채워나갔다. 처음 읽어나갈 때는 자기 계발서의 조언들은 이미 나의 생활루틴으로 자리 잡은 것 같았고, 전공 서적 속의 지식은 내 머릿속에 쏙 들어가 전문가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뿌듯했다. 하지만 읽어나갈수록 무언가 얻는다기보다는 글을 '읽고만 있다'라는 생각을 했다. 책을 읽고 있는데 체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잠깐 주위를 둘러보고 나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고 잠시 책과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활자중독처럼 무언가 계속 읽고 싶어 하는 나에게 책을 보지 않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었고 최대한 평범하게 보이는 소설 한 권을 찾아냈다. 이름부터 편의점이 들어가는 소설이라니 너무 친근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넘긴 책에서 처음 마주한 주인고은 교사를 그만두고 노년을 보내는 '염 여사' 와 '독고'라는 노숙자였다. 한적한 마을의 편의점 점장인 염 여사는 사촌 언니의 장례식에 내려가던 도중 파우치를 잃어버린다. 그리고 독고는 이 파우치를 우연히 발견하고 돌려주게 된다. 이 단순한 사건을 통해 염 여사와의 인연을 만들게 되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가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독고는 그녀의 편의점에서 야간 알바를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편의점 알바를 통해 노숙자에서 어엿한 사회인으로 변화해가는 독고의 모습도 눈에 띄지만 그것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독고를 통해 변화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알바를 할 때, 고민을 가진 손님들이 하나둘 찾아오곤 하는데 독고는 이런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것 하나라도 도움을 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손님들은 이런 독고의 모습에 마음을 열고 이런저런 대화를 하게 되고 독고는 손님들에게 따스한 위로와 함께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간단한 조언을 건넨다.
대기업을 그만두고 집에서 게임만 하는 아들과 대화가 단절되어 고민이라는 선숙씨와 나눈 대화를 살펴보면 이런 식이다.
"아들 말을 먼저 들어보세요. 지금 보니까 아들이 말을 안 듣는다고만 하는데 선숙씨도 아들 말을 안 듣는 것 같아요"
"그거예요 들어주면 풀려요 아들말도 들어줘요 그러면 풀릴 거예요 조금이라도"
"이거 삼각김밥도 사가요 게임할 때 먹기 좋아요 근데 김밥만 주면 안 돼요 편지 같이 줘요
그동안 못 들어줬다고 이제 들어줄테니 말해달라고 편지 써요"
손님들도 처음에는 너무나 당연한 소리에 어이없어하며 그런 걸로 되겠냐 손사래 치지만, 독고의 진심 어린 마음과 배려를 느끼고 실천하게 된다. 그런 실천이 하나 둘 모여 손님들은 고민을 해결하고 회복하여 삶을 힘차게 살아간다. 실천해야 변화할 수 있다는 교훈을 주는 독고처럼 나도 실천을 통해 발전한 경험들이 새록새록 떠올랐고 그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작년 말부터 나는 분대장이 되었다. 분대장으로 있는 동안에는 분대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리더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분대장 임명식을 하기 전후로 연등을 해가며 리더에 관한 책, 팀을 이끌어가는 방법에 대한 책을 많이 읽었다. 읽었던 내용을 모두 정리하며 멋진 리더로서 거듭났다고 생각했다. 분대원을 충분히 이끌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난 혹한기 훈련 때, 한 분대원에게 명확하지 않은 지시를 내렸다가 그 지시로 인해 분대원이 식사를 못할 뻔한 상황이 생겼다. 분명 나는 책을 읽고 '리더는 항상 명확하게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실천하지 못했다. 다행히 그 분대원은 남은 반찬으로 식사를 하고 잘 마무리되었지만 그 상황을 계기로 내가 알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행동으로 이어지기 어렵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훈련이 끝나고 정비를 하면서 내가 정리해놓은 노트를 다시 읽어보니 적어놓은 내용을 모두 지키기에는 너무 많고 또 나에게 적용되지 않는 것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항목도 있었다. 그래서 내가 지킬 수 있는 것들만 고르고 정리해서 <군 생활을 하며 내가 분대장으로서 지켜야 할 것>이라는 목록을 새로 만들었다. 목록은 독고가 조언하고 실천하는 것처럼 거창하지 않다. 몇 가지 내용을 적어보면
<군생활을 하며 내가 분대장으로서 지켜야할 것>
1. 구성원의 이야기를 시큰둥해하지 않고 건성으로 듣지 않기
2. 구성원을 손가락으로 오라가라 하며 불러대지 않기
3. 말을 모호하게 해서 헷갈리게 하지 않고 명확하게 알려주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책임지기
4. 잘못된 문제점은 가능한 빠르게 정확히 책망하지 않고 설명하기
5. 구성원 각각을 편애하기 (누군가만 더 좋아하는 편애가 아닌 개개인이 특별하게 느낄 수 있게 누구에겐 뭘 더 알려준다든지, 더 웃어준다든지와 같이 개인마다 다른 애정을 쏟아주자)
등등 이렇게 단순하지만 행동하면 달라지는 것들이다. 이 목록을 쉬는 시간이나 개인 정비를 할 때, 최대한 자주 보면서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확실한 목록을 가지고 실천하게 되니 확실히 이전과 같은 문제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분대원들과의 관계도 더욱더 돈독해지고 단단해졌다. 누군가는 병 분대장을 하는데 이런 목록까지 필요하냐는 생각이 들 수 있다. 하지만 간부님들이 없을 때 분대원들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분대장뿐이다. 그렇기에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해야 함을 느끼기에 작성하게 되었다. 또한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몸소 실천하는 것이 나중에 내가 다른 곳에서 리더가 되었을 때도 그 임무를 수행할 때 좋은 밑거름이 될 것이다. 우리는 실천하는 방법들을 모르고 있지 않다. 군인으로서 기본적인 생활을 할 때, 누가 시키니까, 누가 하라고 했으니까 라는 생각을 하며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내가 주체가 되어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올바른 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기본을 지킬 줄 아는 군인이 될 것이라 자부한다.
사실 요즘에는 소설에서 얻을 게 없다고, 잠깐 머리를 쉬게 해주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계발서와 전공서적에서 내 삶에 변화를 줄 수 있는 교훈과 지식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책을 읽게 된 건 그런 딱딱한 문장과 단호한 말들로만 나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였다. 팔꿈치로 쓱 건드려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는 넛지처럼 부드럽고 잔잔한 이야기로도 나에게 충분한 영감을 주고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며 체할 것 같던 기분은 어느새 사라지고 독고와 함께 문제를 해결해낸 손님들처럼 나는 다시 삶을 살아갈 자신감과 태도를 다잡을 수 있었다.
멈추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지금 삶의 여유를 잃어버린 이들이 있다면 잠깐 불편한 편의점에 들러보면 어떨까?
조용한 편의점에 앉아 차분히 들어주는 독고와 대화를 나누다보면 어느새 다른 손님들처럼 고민을 해결하고
남은 삶의 여정을 힘차게 살아나갈 의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상병 때 적은 독후감이다. 아마 2022년도 1분기에 낸 거라 3월 말에 적은 걸로 기억하는데 확실히 편해졌을 때라 조금 더 편하게 적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책을 정말 정말 좋아했는데 군대 들어오기 전까지 한 5년은 책이라곤 학교 수업 때만 읽었다. 전역한 지금도 다시 책에 손이 잘 가지 않는다. 참 사람은 간사하다 이때는 책이 유일한 탈출구였는데 지금은 좋다고 아이패드와 컴퓨터를 보며 즐거워한다. 독후감들은 나의 과거를 다시 보고 현재를 반성하기 위해 적는다
'Reading Lif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살고싶다는 농담> (1) | 2022.12.24 |
---|